2024학년도 외대 한불과에 진학하게 된 정*영입니다. 숙원과도 같았던 통대 입시에 합격하게 되어 만감이 교차하는데요.
차분히 수기를 적으며 생각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저처럼 통대 입시에 도전하기까지 고민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의 준비
저는 학부 2년쯤 존경하던 교수님을 통해 통번역사라는 직업을 접했습니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통역사 에피소드 하나하나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고, 학부를 마칠 때쯤부터 수행통역 아르바이트를 통해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서 학업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일할 기회를 엿보며 도전해보았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있고 제 성격과 성향에도 제법 잘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통역사라는 꿈이 제게 스며들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네요.
2023년은 세 번째로 통대 입시를 준비한 해였습니다. 2017년에 한 번, 2021년에도 한 번 통대 입시를 염두에 두고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올해처럼 본격적인 준비는 아니었더라도, 얼마나 통대를 오래 전부터 생각했고 망설였고 또 기다렸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학부를 졸업한 뒤, 여러 진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결국엔 파리 소재 대학원을 진학을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대학원에서는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ESIT도 병행하며 몸에 맞는 공부를 계속 찾았습니다. ESIT를 다니면서 통대 재학생들과 수업을 듣게 되어 통대 진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문학보다는 통번역을 할 때 느끼는 효용감과 즐거움이 갑절로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로에 조금씩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잠깐일 줄 알았던 프랑스 체류가 길어져 20대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의 생활도 제법 뿌리를 굵게 내려 귀국을 결심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에서 프리랜스 통번역사, 한국어 강사로 알음알음 일을 했습니다. 번역가와 온라인 강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비대면 집안에 갇혀 하루종일을 보내는 날이 많았고, 어디 마땅히 털어놓을 데도 없이 직업적으로 드는 고민, 답답함을 혼자 삼키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날엔 ‘이런 식으로 계속 일만 할 수 있을까? 내게는 더 큰 꿈이 필요한 것 같아’라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어디선가 ‘꿈은 커야 깨지고 나서 조각도 크다’라는 말을 보았는데 아직 젊을 때 더 포부있는 꿈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필드에 나가면 냉혹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 전에 체계적인 통번역 훈련을 받고 실력을 더 탄탄하게 하기 위해 통대 진학은 필수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공부를 하고, 일을 하다가도, 앞서 합격하신 분들의 합격 수기를 읽거나 코리아 헤럴드 샘플 강의를 들으며 보내는 밤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 학교를 정말 간절히 원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는 찍어야 할 마침표라면 어서 돌아가 통대를 졸업하자라는 마음으로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자꾸만 글이 길어지나 봅니다. 봉우리 터져 열리는 때가 각자에게 찾아오니 저처럼 기다림이 길어진 분들, 혹여 시험 결과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온 분들도 당장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좋은 기회가 온다는 사실을 믿고 정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돌아돌아 온 길이 버리는 시간이기는 커녕, 더 단단해기 위한 거름이 되어주더라고요.
코리아헤럴드 수업
서두가 길었는데요, 본격적으로 학원 수업과 공부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3월: 시작반 Zoom
4월-7월: 실전반 현장 강의 (6월 한 달 중단)
8월-10월: 외대 실전반 (Zoom > 현장 강의)
2월에 파리에서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맞다가 ‘미련 가질 일을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이 번뜩 들며 통대 입시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파리에서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당장 들어갈 수 없었던 탓에 이미숙 선생님께 상담을 받고 3월 수업부터 Zoom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Zoom 수업은 물리적으로 학원에 갈 수 없는 학생, 수업 당일 사정이 생겨 학원에 가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개설됩니다. 다행히도 시차가 맞아서 저녁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숙 선생님께서도 감사하게도 비대면 학생들도 거의 동일한 조건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셔서 따로 녹화본 수업을 재생해서 듣는 것보다 집중하고 몰입해서 수업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4-5월에는 한 달 동안 휴가차 한국에 들어가서 현장 수업을 듣다가, 다시 비대면으로 듣다가, 입시 직전인 9월 말에야 학원으로 돌아오게 되어서 덩달아 정신이 없으셨을텐데 오락가락하는 저같은 수강생도 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4-5월에는 목소리만 듣던 같은 반 친구들 얼굴도 익히고 선생님들께도 인사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화면 상으로만 뵙다가 인사를 드리니 금세 유대감도 생기고, 마지막에 연락처를 받아온 친구들과도 비대면 스터디를 제안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확실히 현장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학우들간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입시 생활도 조금은 할 맛이 났습니다. 온라인 수강을 하시는 분들도 한 번쯤은 인사도 나누시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코리아헤럴드에서의 수업은 입시 레이스를 위한 기반을 잡는데 최적화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관심 가지지 못했을 주제도 다루게 되고 앞으로 통대 생활과 공부에 반드시 필요할 밑바탕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저처럼 편식이 심한 사람도 선생님들께서 선정해주신 주제를 통해 다양한 내용을 커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 통역 인증 챌린지
봄에 수업을 들으면서는 혼자 공책에 모르던 단어나 연어구 등을 정리하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그밖에는 수업 녹화본을 재생하면서 통역을 다시 한 번씩 해보는 정도였습니다.
6월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원 수업을 한 달 중단했습니다. 소화해야 할 양에 비해 시간이 부족했고, 압박을 느끼기보다는 스스로의 리듬에 맞추어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혼자서는 어떤 구속력도 없었기 때문에 생각을 해낸 것이 챌린지였습니다. 저는 본래 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동기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물리적으로 학원을 다니지 않고 있다보니 팀을 꾸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오랫동안 운영하던 블로그를 이용했습니다. ‘프랑스어 공부/통역 챌린지’ 공지 글을 올리고 Les arpenteuses라는 챌린지팀을 꾸려서 스무 명 남짓 한 분들과 각자 챌린지 인증을 하면서 학원 수업 없이도 두 달 가량 나름 즐겁게 통번역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쉐도잉, 문장구역, 낭독, 자막을 보며 시역하는 등 불어로 할 수 있는, 통역에 도움이 될만한 훈련을 바꾸어 가면서 했습니다. 물론 단어 정리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학원에서 제공해주는 틀에만 갇히지 않고 자기주도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공부 방법을 찾아보던 이 시간 덕분에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넓고 깊게 사이의 균형
통번역대학원 입시는 시사 전반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갖추는 데 최고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양이 워낙 방대하고 범위도 없는 시험이기 때문에 하나를 알겠다하고 만족감을 느끼기도 전에 모르는 것 수십 가지가 딸려나옵니다. 닥치는대로 공부를 하다보면 1분 30초짜리 통역 하나, 기사 지문 하나 정도를 읽고 다음 주제로 바쁘게 넘어가기 쉬운데요. 당연한 말이지만 지문 하나만 읽었다고 자유자재로 통역이 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선택과 집중’입니다. 입시 기간이 길고 짧고를 떠나서 내가 모든 주제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공부를 하다보면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라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 주제를 집어서 적어도 같은 주제의 지문을 3-4개를 읽으며 같은 표현을 어떻게 하는지 확장시켜 보고, 한국어/불어 평행 지문을 찾아보는 일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도파민’이라는 주제를 스터디에서 다루고 잘 나오지 않아서 실망한 일이 있었는데요. 기사를 10페이지 정도 뽑고 도파민 관련 다큐멘터리나 YouTube 영상을 시청하면서 관련 표현을 완벽하게 정리하려 했습니다. 하나를 정리하는 것이 시간 낭비는 아니었습니다. ‘숏폼 컨텐츠’, ‘청소년 SNS 중독’, ‘팝콘 브레인’ 등 도파민은 인터넷 환경에 대한 주제라면 한 번쯤은 언급되기 때문에 이렇게 중요한 주제는 각잡고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통역을 생활처럼
프랑스에서 나름대로 긴 시간 체류해 발화는 어렵지 않았으나 메모리로 통역하는 일은 처음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통역은 기본적으로는 ‘말을 하고 듣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니 통역을 할 때 지나치게 긴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통역 연습을 할 때는 마이크를 잡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한다는 부담감에 떨기 쉽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잘 들리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자’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터디를 할 때에도, 수업에서도 ‘내가 이해한 바를 출발어를 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풀어서 전달한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말하는 듯’ 통역이 잘 나오게끔 수시로 연습을 했습니다. 통역 연습은 아무래도 주변에서 듣는 사람이 있으면 눈치가 보여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 없는 곳에서 산책을 하면서, 자전거를 타면서, 집안일이나 샤워할 때도 중얼중얼 해본 통역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생활화했습니다.
특히 한 번 해본 통역을 여러 번 다시 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통역하며 막혔던 부분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풀어보며 해법을 찾아나가기도 하고, 한 번 써본 표현 말고 다른 말로 하며 표현을 확장시키기도 했습니다. 2차 시험 당일에도 학교 근처에서 숙소를 잡아 하루 잔 다음, 아침에 나갈 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가며 기억에 남아있는 통역문을 연습하며 목과 입을 풀었습니다.
통번역 연습 컨텐츠
다음은 제가 애정한 통번역 연습 컨텐츠를 소개해보겠습니다.
/ 프랑스어
Maintenant, vous savez : 3분 남짓 팟캐스트로 길이도 적당하고 시험 주제와 결이 매우 비슷합니다. 영어 친화적인 팟캐스트라 영어권에서 도입되는 신개념들을 종종 소개하는데, 그 부분이 외대 입시와도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France Culture 같은 컨텐츠는 무척 지적이고 장황해지는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이 팟캐스트는 간결하고 입시 유형과 가장 비슷해서 애용했습니다. 3분 길이를 통으로 듣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틈틈이 생활에서 통역해보는 식으로 사용했고, 스터디에도 이용했습니다. 참, 프랑스 서점에서 보니 책으로도 출판이 되어있었습니다. 최근 이슈를 담은 시사 상식 사전쯤으로 이용되는 것 같았어요.
Splash / Vlan : 경제 관련 이슈를 담은 팟캐스트입니다. 워낙에도 경제만 만나면 숨고 싶을 정도로 큰 구멍이라 쉬운 내용부터 채워나가고 싶어 구독했습니다. 외대에서는 산업경제 번역 수업이 있다고 들어서 거기에 대비하는 용도로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팟캐스트에서 시작해 책이 나온 케이스라 프랑스에서 책도 업어왔어요!
Le gout de M :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팟캐스트인데요, 전혀 시사적이지 않고 사람들의 취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상 관련 표현을 접하기 쉽고 인터뷰 구어체로 되어있다보니 입을 풀 때 많이 사용했습니다.
Usbek & Rica : 젊은 세대를 겨냥한 뉴스 웹사이트입니다.
/ 한국어
YTN, MBC, SBS 뉴스 클립 : 클립으로 편집되어 나온 뉴스 중 사회 주제로 한 내용을 통역 연습 자료로 사용했습니다.
뉴스레터 : 중앙일보 비크닉, 한겨레 H, 경향신문 점선면, 뉴닉 등, 시사 주제가 친근하고 쉽게 소개되기 때문에 재밌는 주제가 있으면 시역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스터디
본격적인 스터디를 워낙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학원생들을 모두 알지 못했던 터라 여름 쯤부터 승희, 영원이와 고정 스터디를 하나 시작하고, 9월에 한국에 와서는 정미 님과 스터디를 하나 더 꾸려서 했습니다. 스터디원들과 종종 만나며 응원하고 고민도 나눌 수 있어서 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
통역 연습은 개인 연습으로는 한계가 있고, 계속 비슷한 문장 구조를 자기복제하는 위험이 생기기 때문에 스터디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강점을 배우고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랜덤 스터디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 어떤 주제를 다루었는지와 스타일을 파악한 상태에서 고정 스터디를 하는 쪽이 저와는 더 잘 맞다고 느꼈습니다. 스터디 자료는 일찍부터 서로에게 공유해서 도움이 되게끔 하면 좋습니다.
스터디 중반까지만 해도 특히 한불에서 크리틱이 길어져 30-40분을 잡아먹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험에 임박할 수록 실제 퍼포먼스를 위해 한 사람이 불한, 한불을 한 번에 한 뒤에 최대한 간결하게 크리틱을 하며 시험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공부의 효율성 올리기
9월 들어서야 수업 자료를 다시 보기 좋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공부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입시는 코앞으로 다가와있었고 매일같이 새로운 주제는 쏟아지니 숨이 턱 막히기 일쑤였습니다. 수업에서 다룬 내용이나 스터디 자료를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해 출력하고 제본을 맡겨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낱장으로 흩어지지도 않고 내가 만든 나만의 교재 같다는 생각에 애착을 가지고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주제는 파일로 어휘집을 만들었고 주제어 시험 때처럼 한-불 대응쌍으로 문장을 정리해 보며 공부했습니다.
저는 기계치에 기술 혐오자에 가까운 사람인데요…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Chat GPT를 이용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GPT를 이용한 공부 방법이 나쁘지 않아서 이곳에서 공유해보려 합니다.
먼저 Chat GPT 활용 아이디어를 얻은 영상을 아래 링크에 공유할게요.1. YouTube 영상 자막을 글로 변환하기
‘스크립트 표시’ 기능을 눌러 자막을 복사합니다.
“Reecris-moi ce texte en phrases propres”를 입력하면 구둣점, 끊기지 않고 글로 다시 써줍니다!
2. 정의 물어보기
예: “Qu’est-ce qu’une super application ?”
3. 주제어 물어보기
한 가지 주제를 학습할 때 보통 여러 기사를 읽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드는 시간이 많아지는데요, Chat GPT가 이런 시간을 줄여줍니다. “Donne-moi des mots cles et locutions importantes sur le sujet de …” 라고 입력하면 키워드를 촤르륵 내어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4. 예문 물어보기
위에서 얻은 결과 그대로 둔 다음 “Donne-moi des exemples avec ces mots”만 집어넣으면 예시문을 뽑아줍니다.
5. 교정 부탁하기
6. 에세이 모범답안 작성하기
Chat GPT를 대학에서도 많이 쓴다고 하던데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저도 에세이 준비에 이 기술을 쓰고 있더라고요..! 다만 내가 한 번 작성해본 에세이 주제에 한해서 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 듯합니다.
번역가는 유난히 기술이 대체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Chat GPT 같은 기술이 등장할 때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GPT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어도 이 친구가 제시하는 문장을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자라는 생각으로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갈수록 기술의 ‘노예’가 되기보다 ‘주인’으로 남는 일이 중요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글이 계속 길어질 것 같으니 시험 경험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차 필답 시험
9월 말 한국에 입국한 후, 1차 시험이 다가오니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당장 한 달 본격적인 입시 생활도 이렇게 버거운데 연초부터 달려온 학우들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을만큼요. 1차에서 떨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소한 실수도 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듯한데, 우리 모두 학생으로 배우려 들어가는 만큼 너무 큰 부담은 가지지 않는 게 마음 건강에 이로울 것 같습니다.
1차 시험의 관건은 시간과 분량입니다. 저의 경우 비대면 수업에서 모의고사를 작성했고 분량도 들쭉날쭉이었습니다. 시험지를 훌쩍 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모자란 날도 있었습니다. 특히 원래 언어적 특성 때문에 그렇더라도 한불 요약은 훨씬 긴 데 반해, 불한은 내용을 꾹꾹 다 적어도 널널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험 당일 응시장에 가니 ‘시험지를 넘어가면 0점 처리한다’라는 말이 무섭게 적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정신 바짝 차려 한불요약은 내용을 처음부터 쳐내가면서 작성하고 반대로 불한요약은 디테일도 적당히 살리며 분량을 채우려 했습니다.
시험장에서 세어보니 요약은 15줄, 에세이는 30줄이었습니다. 시험 당일에는 줄 수를 세고, 3으로 나누어 저만 알아볼 수 있게 5줄 또는 10줄마다 점을 찍어두고 10분 마다 그 점에 닿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썼습니다. 처음부터 분량과 시간을 고려해서 쓰시면 훈련에 도움이 될 거예요.
요약과 에세이에서 제가 어렵게 생각했던 부분은 바로 글의 ‘논조’였습니다. 저는 정보 편식이 심한 편이라 신문이나 기사도 입맛에 맞는 진보 성향 쪽으로 보고는 했는데요. 제 입맛에도, 학원에서 다루었던 논조와도 다르게 어찌보면 보수적일 수도 있는 논조의 기사문이 시험 문제로 나와 당황했습니다. 예를 들어, 학원에서 프랑스 교복 착용 이슈에 대해 부정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 시험에서 교복이 청취요약 주제로 나오긴 했으나 논지가 정반대로 나와 들으며 ‘정말 내가 듣는 게 이게 맞나’라는 생각 때문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시험장을 나오며 통역사로 일하려면 앞으로 나와 견해가 다르거나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의 말도 자주 전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이미숙 선생님께서 강조하신대로 통역사의 중립성을 지키면서 어떤 사람이 말을 하더라도 균형있고 치우치지 않게 잘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차 통역 시험
1차 시험에서 미친듯이 떨렸다면 2차 시험은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생각도 들었고, 더 많은 내용을 머리에 집어 넣기보다 평소에 하던 만큼만 나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방대한 자료에 기 죽기보다는 자신 있게 했던 통역을 다시 들으며 태도를 정비했습니다.
겸손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차 믿고 맡길 수 있는 듬직한 동료 통역사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욕심이 컸습니다. 나란히 앉아계시는 교수님들을 뵈어 면접을 보니 그제야 외대에서 전문적인 통번역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대가 차올랐습니다.
질문으로는 “ESIT 특별과정을 밟았는데 왜 다시 외대 통대에 진학하고자 하는지”, “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럼 문학보다는 통역에 주력할 생각인지” 등 개인적인 Parcours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은 꼭 준비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전 반에서는 불한 통역으로 ‘에이즈를 퍼뜨리는 바나나 괴담’이 나왔습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주제로 작년부터 불한은 사건 위주의 출제 경향이 유지되는 듯했습니다. 반면 한불 통역은 ‘종이 빨대가 정말 친환경적일까?’라는 주제로 이미 학원에서 다룬 적이 있는 주제라 차분하게 통역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분량이 길고 결론이 클리어하지 않은 지문이라 5초 정도 정적이 있었는데, 아쉽지만 시간을 더 끈다고 생각이 날 것 같지 않아 솔직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하고 마무리하니 교수님들이 웃으며 보내주셨습니다.
긴 입시 여정이 무색하게 2차 통역 시험은 찰나에 가까웠습니다. 더 잘 할 걸, 하는 아쉬움보다는 하던 만큼, 할 수 있는만큼 했다라는 마음을 먹으려 애썼습니다.
마치며
시험을 앞두고 ‘싱어게인 3’를 보았는데요, 거기서 한 가수가 ‘요즘 음악하는 친구들은 너무 목숨을 건다. 음악을 하려면 목숨이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한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어를 배우던 학생이 한국어에는 vie가 삶, 인생, 생, 생활, 목숨,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말로 번역이 되냐고 볼멘 소리를 한 적이 있어서 더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목숨을 거는 건 뭐고, 인생을 거는 건 뭘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뭐가 되었든 우리가 하는 공부에 있어서도 장기적인 관점으로, 오래오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거는 쪽이 맞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의 20대는 프랑스에서 보낸 외로움과 자기 부정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어요.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학생들 사이에서 늘 어깨가 움츠러들기 일쑤였고 작은 인정의 말을 들어도 믿지 못했거든요. 2023년 통대 입시는 그런 제 과거에 붙여주는 반창고 같은 시간이었어요.
2023년 한 해 동안 이미숙 선생님, 이슬아 선생님의 다정한 가르침 안에서 훈련받고, 또 야심 있으면서도 착한 동지들을 만나 정말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이미숙 선생님! 모든 주제에 꿰뚫고 계신 선생님이 꼭꼭 씹어 저희에게 전달해주시는 지식이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칫하면 무거워질 수 있는 입시 분위기를 한결 유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사에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는 저와는 달리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 학원가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배울 점이 끝이 없는 이슬아 선생님. 실전반 잠깐 동안이었지만 선생님의 수업 때마다 느끼고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두 분 모두 정말 닮고 싶은 스승님이셔요 :)
좋은 친구들, 미래의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합불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계속 소중한 인연으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내게 정말로 맞는 공부를 만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그에 맞는 결과를 기다리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있을까요. 같은 열정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도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각자의 배경과 배울 점이 있으니 서로 보완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왔던 만큼 2년간의 학교 생활도 지금처럼 서로 도우며, 담대하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